[일본 IT 살아남기 Vol.1] 로봇 호텔에서 체크인하고, 예약 확인은 팩스로? 일본의 기묘한 ‘디지털’

도쿄의 한 호텔. 로비에는 페퍼(Pepper) 로봇이 춤을 추며 손님을 맞이하고, 객실에는 태블릿으로 조명과 온도를 조절하는 최첨단 IoT 시스템이 깔려 있습니다. “역시 기술 강국 일본이구나” 싶어 감탄하던 찰나,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난처한 표정으로 수화기를 듭니다.

“죄송합니다만, 본사에서 예약 확정 문서가 아직 ‘팩스’로 도착하지 않아서요.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네, 실화입니다. 로봇이 춤추는 로비 뒤편 사무실에서는 여전히 “지잉- 지잉-” 팩스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 나라. 최첨단과 아날로그가 기묘하게 공존하는 곳. 이번 연재를 시작하며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주제는 바로 일본의 ‘디지털 패전(敗戦)’과 뒤늦게 불어닥친 ‘DX(디지털 전환) 열풍’입니다.

도대체 왜 아직도 팩스를 쓰는 걸까?

한국 IT 업계 종사자들이 일본 파트너사와 일할 때 가장 당황하는 순간이 바로 “견적서 원본을 팩스로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을 때입니다. 이메일 첨부파일이 있는데 왜 굳이? 여기에는 일본 특유의 **’도장(Hanko) 문화’**와 **’문서주의’**가 깊게 박혀 있습니다.

  • 도장이 찍혀야 진짜다: 일본 비즈니스에서 ‘결재’는 곧 상사의 도장을 의미했습니다. 전자 서명보다는 빨간 인주가 묻은 실물 도장이 찍힌 종이가 있어야 ‘법적 효력’과 ‘신뢰’가 생긴다고 믿는 경향이 강했죠. 도장을 찍으려면 종이가 필요하고, 종이를 보내려면 팩스가 가장 빨랐던 겁니다.
  • 변화를 싫어하는 현장: “지금까지 문제없이 잘 돌아갔는데 굳이?”라는 보수적인 마인드도 한몫했습니다. 기존에 구축된 레거시 시스템을 뜯어고치는 리스크를 감수하느니, 익숙한 팩스를 계속 쓰는 쪽을 택한 것이죠.

코로나19, 일본의 ‘디지털 민낯’을 까발리다

이 견고한 아날로그 성벽을 무너뜨린 건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였습니다. 전 세계가 재택근무로 전환할 때, 일본 직장인들은 재택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고요? “결재 서류에 부장님 도장을 받아야 해서” 출근을 해야 했거든요.

심지어 코로나 감염자 집계를 팩스로 보고하다 보니 통계가 누락되거나 지연되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일본 언론 스스로 “디지털 패전(Digital Defeat)”이라 부르며 자조 섞인 비판을 쏟아냈던 시기입니다.

‘도장과 팩스를 없애라!’ 일본의 DX 대반격

충격을 받은 일본 정부는 2021년, 총리 직속으로 **’디지털청(Digital Agency)’**을 신설하며 칼을 빼 들었습니다. 당시 고노 다로 디지털부 장관은 “행정 절차에서 도장을 폐지하고, 팩스 사용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했죠. 더 재미있는 건 **”플로피 디스크 퇴출 선언”**이 불과 몇 년 전(2022~2024년)의 주요 뉴스였다는 점입니다.

지금 일본은 그 어느 때보다 **DX(Digital Transformation)**에 목말라 있습니다.

  • SaaS 시장의 폭발: 도장 대신 전자계약 서비스(CloudSign 등)가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 클라우드 전환: 보수적인 대기업들도 온프레미스에서 클라우드로 대거 이동 중입니다.
  • 업무 효율화 툴: 한국의 ‘네이버웍스(일본명 라인웍스)’가 일본 업무용 메신저 시장 1위를 차지한 것도, 쓰기 편한 모바일 기반 툴을 찾는 수요와 맞아떨어졌기 때문입니다.

[Editor’s Real Story] 도장 받으러 서류가 비행기를 탄다?

10년 전, 제가 직접 겪은 일입니다. 후쿠오카 거주 시절 ‘후쿠오카은행’ 계좌를 텄는데, 이후 도쿄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입출금 내역서가 필요해 도쿄에 있는 후쿠오카은행 지점을 찾아갔죠. 같은 은행이니 창구에서 바로 떼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직원의 대답은 충격적이었습니다.

“고객님, 계좌 개설 점포(후쿠오카)의 원장 대조와 결재 도장이 필요합니다. 신청서를 후쿠오카로 보내고 승인 후 우편으로 발송해 드리니 1주일 정도 걸립니다.”

한국이라면 인터넷 뱅킹으로 1분이면 출력했을 종이 한 장을 받기 위해, 제 신청서는 도쿄에서 후쿠오카까지 여행을 다녀와야 했습니다. 10년 전 이야기라 지금은 시스템이 많이 개선되었겠지만, ‘데이터’보다 ‘담당자의 도장’을 중시하는 일본 금융권의 보수적인 성향을 뼈저리게 느낀 순간이었습니다.

한국 기업에게 열린 기회

일본의 디지털화가 늦다는 건, 반대로 말하면 **’한국 IT 기업이 진출할 빈 땅이 엄청나게 넓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한국은 이미 10년, 20년 전에 겪었던 전산화 과정을 일본은 이제 막 압축적으로 겪고 있습니다. 한국 특유의 ‘빨리빨리’ 정신으로 만든 직관적인 UI, 모바일 최적화 솔루션은 일본 시장에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주의할 점은 있습니다. 그들은 기술이 없어서 팩스를 쓴 게 아니라, ‘확실함’과 ‘절차’를 중시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술을 팔되, 그들의 꼼꼼한 프로세스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팩스 기계가 사라진 자리에 무엇이 놓이게 될까요?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당신의 소프트웨어가 될 수도 있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기술만큼이나 중요한, <일본 비즈니스맨들의 독특한 명함 교환과 이메일 예절>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Editor’s Note] 3줄 요약

  • 일본이 팩스를 못 놓았던 이유는 기술 부족이 아니라 ‘도장 문화’와 ‘절차 중시’ 때문.
  • 코로나19로 아날로그의 한계를 절감하고, 국가 차원에서 ‘디지털청’을 만들어 대대적인 DX 진행 중.
  • 이제 막 디지털 전환기에 접어든 일본은 한국 IT/SaaS 기업에게 거대한 기회의 땅이다.

#일본 #팩스 #일본진출 #DX(Digital Transformation) #도장

Written by J브릿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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